농부의 노트 · 밭 위의 실험
감귤밭 옆에서, 바나나가 노랗게 익어갑니다
감귤과 키위 사이, 하우스 한 켠에는 바나나도 몇 그루 자라고 있습니다. 제주가 육지보다 따뜻하다는 건 다들 아시지만, 그렇다고 열대는 아니라서 이 낯선 열매를 키우려면 손이 좀 더 갑니다. 크게 내다 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고, 정말 되는지 궁금해서 심어본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감귤밭에 웬 바나나였을까요
저희 밭은 원래 감귤과 키위가 전부였습니다. 1987년에 아버지가 처음 심은 게 감귤나무였고, 제가 농원을 물려받으면서 그 옆에 키위를 더했습니다. 바나나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딱히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하우스 한쪽이 비어 있는 걸 보다가 문득 이것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게 시작이었습니다. 화학과에서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보면 몸에 남는 습관이 있는데, 일단 해보고 눈으로 확인하자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감귤과 키위는 아버지와 저, 두 세대가 함께 골라 온 작물이지만, 바나나는 순전히 제 호기심만으로 시작한 작물이라 저한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도 제가 이것저것 심어보는 걸 딱히 말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밭을 둘러보다가도 유독 바나나 앞에서는 한 번 더 멈춰 서게 됩니다.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고 합니다
바나나를 심고 나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여러해살이풀에 가깝다는 겁니다. 줄기처럼 보이는 부분도 사실은 잎이 겹겹이 말려 단단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감귤나무나 키위나무 같은 목본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라는 셈인데, 그래서인지 자라는 속도도 눈에 띄게 빠른 편입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정성을 쏟아온 저한테는 이 점이 은근히 낯설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제주는 따뜻해도 열대는 아닙니다
바나나는 열대 작물이라 추위에 유독 약합니다. 생장에 알맞은 온도는 25도 안팎이고, 기온이 13도 아래로만 떨어져도 냉해를 입기 시작합니다. 저희가 키우는 감귤이나 키위도 추위를 마냥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쌀쌀한 겨울은 견뎌내는 편입니다. 반면 바나나는 그 기준 자체가 다릅니다. 제주가 육지보다 겨울이 포근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예민한 기준을 노지에서 맞춰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한겨울엔 기온이 뚝 떨어지는 날도 있어서, 결국 바나나는 하우스 안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 작물입니다. 하우스는 단순히 추위만 막아주는 공간이 아닙니다. 습도를 조절해 곰팡이 발생을 줄이고, 벌레나 병해충이 들어오는 것도 어느 정도 막아주는 역할까지 함께 합니다.
습도와의 싸움
바나나를 키우면서 새삼 신경 쓰게 된 게 습도입니다. 하우스 안 습도가 90퍼센트를 넘는 상태로 오래 이어지면 곰팡이병이 빠르게 번질 수 있다고 해서, 저희도 환기를 자주 시켜 60에서 70퍼센트 선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함께 챙기는 부분입니다. 다른 농장에서 천장의 이슬을 매일 걷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저희도 아침저녁으로 하우스 안쪽 비닐을 한 번씩 살피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감귤이나 키위를 키울 때는 그렇게까지 의식하지 않던 습도를, 바나나 덕분에 다시 들여다보게 된 셈입니다.
제주에도 바나나를 키우는 농장이 있습니다
바나나를 심어보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 제주에도 이미 바나나를 본격적으로 키우는 농장이 있었습니다. 5.8미터 높이의 온실을 지어, 무농약으로 바나나를 재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 하우스보다 훨씬 높게 지은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나나 잎이 뿜어내는 습기 때문에 천장에 이슬이 자주 맺히고, 이걸 매일 걷어주지 않으면 무름병이 생긴다고 합니다. 매일 그 넓은 천장을 손질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손이 꽤 많이 가는 작물이라는 게 실감이 납니다. 저희 하우스는 그 정도로 높지도, 그렇게까지 손이 많이 가지도 않지만, 같은 열매를 놓고 이런 정성을 들이는 농장이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괜히 반가웠습니다. 온실 하나를 그렇게까지 높게 짓는 것도 결국은 그 작물의 습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스마트팜으로도 키웁니다
제주만의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경남 산청에는 약 23,140제곱미터에 이르는 대형 시설하우스에서 바나나 모종 5,600그루를 키우는 스마트팜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높이 7미터짜리 하우스 안에서 온도·습도·이산화탄소 농도까지 자동으로 맞춰준다고 하니, 저희처럼 매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가며 키우는 방식과는 아예 결이 다릅니다. 센서와 장비가 대신해주는 일을, 저희는 아침저녁으로 하우스 문을 여닫으며 몸으로 확인하는 셈입니다. 규모로 보면 비교가 안 되지만, 그런 큰 농장도 결국은 저희와 똑같은 질문, 그러니까 제주와 육지에서도 바나나가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든든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사례들을 알고 나니, 국내에서 바나나가 아주 낯설기만 한 작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루 중 바나나에 들이는 시간
감귤과 키위에 비하면 아직 바나나에 들이는 시간은 짧습니다. 그래도 아침에 하우스를 둘러볼 때는 바나나 잎 상태부터 한 번씩 살핍니다. 잎이 축 처져 있으면 물이 부족하다는 신호고, 색이 유난히 짙어지면 반대로 과습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감귤과 키위를 오래 돌보면서 생긴 감각이 바나나한테도 어느 정도는 통하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낯선 작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키워보니 밭에서 쌓아온 경험이 아예 쓸모없지는 않다는 걸 매일 확인하는 셈입니다. 작물이 다르다고 해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도, 바나나를 통해 새삼 느끼는 부분입니다.
노랗게 익어가는 원리
바나나는 사실 다 익어서 노래진 채로 수확하는 과일이 아닙니다. 아직 푸르스름할 때 따서, 사람 손에 오는 동안에도 계속 익어갑니다. 감귤이나 키위와는 달리, 수확이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 진짜 변화가 시작되는 과일인 셈입니다. 이 숙성을 이끄는 건 과일 스스로 뿜어내는 에틸렌이라는 기체인데, 사과와 바나나가 특히 이 기체를 많이 내뿜는 과일로 꼽힙니다. 예전에 키위가 더디게 익을 때 바나나를 같이 넣어두면 빨리 물러진다는 이야기를 적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나오는 기체도 결국 이것과 같은 에틸렌입니다.
에틸렌이 녹말을 포도당과 과당으로 바꾸면서 단맛이 붙고, 펙틴을 분해하면서 식감이 물러집니다. 화학과에서 배운 원리를, 요즘은 밭에서 바나나 껍질 색이 노랗게 변하는 걸 보며 다시 떠올립니다.
보관하면서도 계속 지켜보는 재미
수확한 뒤에도 바나나는 계속 변합니다. 13도에서 18도 사이에 두면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알맞은 속도로 익어갑니다. 그 범위를 지키려고 저도 온도만큼은 신경 써서 맞추는 편입니다. 매일 아침 하우스에 들를 때마다 색이 조금씩 달라져 있는 걸 보는 게, 저한테는 은근히 기다려지는 일 중 하나입니다. 감귤이나 키위는 나무에서 어느 정도 익은 채로 따지만, 바나나는 따고 나서도 한참을 더 지켜봐야 하니, 같은 밭인데도 전혀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는 작물입니다.
아직은 크게 팔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희 바나나는 아직 내다 팔 만큼 규모를 갖춘 게 아닙니다. 하우스 한쪽에서 몇 그루가 자라는 수준이고, 수확량도 감귤이나 키위처럼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주나 산청의 농장들처럼 온실을 새로 짓거나 자동화 설비를 들인 것도 아니어서, 지금은 이 정도 환경에서도 정말 열매가 맺히는지, 맺힌다면 어떤 맛이 나는지를 눈으로 확인해보는 단계에 가깝습니다. 가끔 밭에 들르신 손님들이 낯선 나무를 보고 저게 정말 바나나가 맞느냐고 물어보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맞다고, 다만 아직은 파는 게 아니라 지켜보는 중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손님들께 감귤이나 키위처럼 자신 있게 권해드릴 수 있는 물건은 아직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좋겠지만, 지금은 저 혼자 궁금해서 지켜보는 실험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궁금한 게 하나 더 늘었습니다
감귤나무 사이에 낯선 열매 하나가 자란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진 않습니다. 그래도 매일 하우스 문을 열 때마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되든 안 되든, 그 궁금증 하나로 당분간은 계속 심어볼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