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트 · 밭 위의 실험
블루베리가 원한 흙, 감귤과는 달랐습니다
블루베리를 처음 심어보려던 날, 저는 밭의 흙을 통째로 다시 봐야 했습니다. 감귤도 키위도 군말 없이 자라던 흙인데, 블루베리 앞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은 하우스 한켠에서 아주 조그맣게만 이어가고 있지만, 그 흙을 알아가던 과정만큼은 밭에서 겪은 일 중 손에 꼽을 만큼 화학과 학생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블루베리는 왜 갑자기 궁금해졌나
저희 밭의 중심은 늘 감귤과 키위였습니다. 한라봉 같은 고급 감귤류와 레드키위·루비키위, 이 두 축만으로도 한 해가 벅찰 만큼 바쁩니다. 그런데 블루베리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는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른 과일도 아니고 유독 산성 흙을 원한다는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감귤도 키위도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화학과를 나온 사람으로서 그 이유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은 밭일을 하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하우스 한켠에 블루베리 묘목 몇 그루를 들이면서 이 실험이 시작됐습니다.
흙을 파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묘목을 심겠다고 마음먹고서야, 정작 우리 밭 흙이 블루베리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감귤과 키위는 몇십 년째 이 흙에서 별 탈 없이 자라 왔으니, 저는 그 흙이 그냥 ‘보통의 좋은 흙’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블루베리 앞에서는 그 흙이 오히려 걸림돌이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볼수록 감귤·키위와는 아예 다른 성질의 흙이 필요하다는 게 분명해졌고, 결국 블루베리를 심을 자리만큼은 산도를 낮추는 작업부터 따로 해야 했습니다. 같은 밭 안에서 흙을 두 가지로 나눠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 뙈기 밭인데도 작물마다 원하는 흙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저는 그때 처음으로 몸으로 배웠습니다.
왜 하필 산성이어야 하는가
블루베리가 좋아하는 산도는 pH 4.5에서 5.5 사이라고 합니다. 흙의 산도가 왜 열매 하나를 이렇게까지 좌우하는지, 여기서부터는 제 전공이 조금 쓸모가 있었습니다. 철분이나 망간 같은 미량원소는 흙 속에 아예 없는 게 아니라, 산성 환경일수록 더 잘 녹아서 뿌리가 빨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산도가 낮지 않은, 그러니까 중성에 가까운 흙에서는 이 미량원소들이 흙 입자에 단단히 붙들려 있어서 뿌리 코앞에 있어도 식물이 흡수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영양분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 ‘잠겨 있어서’ 못 먹는 셈인데, 대학 시절 이론으로만 배운 그 개념을 밭에서 실제로 마주치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감귤이나 키위 나무를 보면서는 한 번도 흙 속 성분의 ‘용해도’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블루베리 덕분에 그 습관이 새로 생겼습니다.
교과서에서 외우던 pH 곡선이, 밭에서는 열매 하나가 열리고 안 열리고를 가르는 선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산성이 지나쳐도 안 되는 이유
그렇다고 무작정 산성으로 밀어붙이는 게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산도가 지나치게 낮아지면 이번에는 반대 문제가 생깁니다. 미량원소가 너무 잘 녹아 나오면서 뿌리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까지 흡수되어, 오히려 나무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료에서 봤습니다. 그러니까 블루베리에게 맞는 흙은 ‘산성이면 산성일수록 좋은’ 흙이 아니라, 딱 어느 구간 안에 들어와야 하는 좁은 범위의 흙이었던 셈입니다. 화학에서 배운 적정 개념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걸 알고 나니, 산도 하나 맞추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섬세한 작업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이부시와 래빗아이, 두 갈래 이야기
품종을 알아보다 보니 블루베리도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추위를 잘 견디는 하이부시 계열과, 추위에는 약하지만 나무 자체가 실하게 자라는 래빗아이 계열입니다. 하이부시는 저온을 오래 겪어야 꽃을 제대로 맺는 편이고, 래빗아이는 그 조건이 훨씬 느슨해서 따뜻한 지역에서도 비교적 수월하다고 들었습니다. 수확 시기도 서로 달라서, 하이부시는 초여름에 먼저 나오고 래빗아이는 늦여름에서야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감귤과 만감류가 수확 시기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듯, 블루베리 안에서도 품종마다 맡는 계절이 다르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하우스 안이라 바깥 추위를 어느 정도는 막아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제주 겨울 기온을 감안하면 아무 품종이나 골라 심을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품종 하나 고르는 데도 흙 산도 못지않게 따져볼 게 많다는 걸, 이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흙을 다시 만드는 일,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산도를 낮추는 일이 한 번 해두면 끝나는 작업이었다면 아마 지금도 훨씬 크게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흙은 가만히 둬도 원래 성질로 서서히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어서, 한 번 만들어둔 산성 환경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손을 봐야 했습니다. 감귤과 키위는 심어놓으면 그 해 흙 그대로 큰 무리 없이 자라주는데, 블루베리는 매년 그 구역만 따로 신경 써야 하니 손이 배로 들었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흙 속의 일이라, 게을리하면 표가 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결국 규모를 줄인 이유
감귤밭 넓히는 일과 블루베리 구역을 돌보는 일이 같은 계절에 겹칠 때는, 결국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순간이 종종 있었습니다. 밭 전체를 놓고 보면 감귤과 키위가 분명한 주업인데, 거기에 들여야 할 손까지 블루베리 쪽으로 자꾸 나뉘다 보니 어느 순간 규모를 줄이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실패라기보다는, 지금 가진 손과 시간을 어디에 더 써야 할지를 정직하게 따져본 결과였습니다. 한창때보다 나무 수를 많이 줄인 지금이, 오히려 저희 밭 사정에는 맞는 크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조금씩은 이어가는 이유
그렇다고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우스 한쪽에는 블루베리 몇 그루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규모를 키우는 문제와 별개로, 산도를 맞춰가며 열매를 보는 일 자체가 저한테는 여전히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감귤과 키위처럼 밭의 중심은 아니지만, 흙을 매만지며 확인해보고 싶은 게 아직 남아 있는 한 이 정도 크기로는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여름 한 철, 열매가 맺힌 가지를 보면 그해 산도 관리가 맞았는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어서, 그 확인 자체가 나름의 즐거움이 됐습니다. 크게 벌이지 않아도 되는 실험이라는 게, 오히려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작게, 그래도 계속
블루베리는 저희 밭에서 여전히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진 않습니다. 그저 산도 하나로 이렇게 다른 흙이 된다는 사실을, 앞으로도 이 하우스에서 계속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