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트 · 밭 위의 실험
체리, 아직은 몇 그루뿐입니다
체리는 겨울 추위를 겪어야 봄에 꽃을 잘 피우는 과일이라고 합니다. 제주 겨울이 그 추위를 얼마나 채워줄 수 있을지 아직 다 확인하지 못해서, 저희 집 체리는 몇 그루의 작은 시도로만 남아 있습니다.

체리가 궁금했던 이유
감귤과 키위 다음에 뭘 더 심어볼까 하는 생각은, 사실 밭을 놀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블루베리도 그렇게 하우스 한켠에 자리를 잡았고, 제주에서는 낯선 바나나도 같은 마음으로 들였습니다. 체리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트나 시장에서 보던 그 새빨간 열매가 우리 밭에서도 자랄 수 있을지, 단순한 궁금증이 시작이었습니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건 아닙니다. 되는지 안 되는지 일단 한번 심어보고 지켜보자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아버지가 예전에 감귤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도 아마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나씩 새로운 걸 들여보는 게 재밌습니다.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이유를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겨울 추위가 필요한 과일이라는 것
체리를 알아보면서 처음 알게 된 게 있습니다. 체리는 겨울에 일정 시간 이상 추위를 겪어야 이듬해 봄에 꽃을 제대로 피우는 과일이라는 겁니다. 흔히 저온요구량이라고 부르는데, 대략 7.2도 이하로 떨어지는 시간이 충분히 쌓여야 나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정확히 몇 시간이 필요한지는 품종마다 다르다고 해서, 여기서 특정 숫자를 딱 잘라 말씀드리기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핵심은 분명합니다. 체리는 추위를 건너뛰고는 제대로 자라기 어려운 과일이라는 것입니다.
화학과에서 배운 개념은 아니지만, 나무도 일정한 조건을 다 채워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게 저한테는 왠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육지 산지 이야기를 들으며
국내에서 체리가 많이 재배되는 곳은 주로 경북·경남 쪽 산지라고 들었습니다. 산비탈처럼 볕이 잘 들면서도, 겨울에는 나무가 얼지 않고 여름에는 볕에 데지 않는 자리를 체리가 좋아한다고 합니다. 수확 시기는 5월 중하순에서 6월 초순 사이라, 저희 감귤·키위와는 또 다른 계절에 손이 가는 과일입니다. 그런 산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주와는 조건이 꽤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주 겨울은 조금 다른 도전일 수 있습니다
제주는 감귤이 자랄 만큼 겨울이 순한 동네입니다. 그런데 체리 입장에서는 그 순한 겨울이 오히려 아쉬운 조건일 수 있습니다. 꽃을 제대로 피우려면 일정한 추위를 겪어야 하는데, 제주 겨울이 그 추위를 충분히 채워주는지는 저도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실제로 몇 해 키워보면서도, 경북 산지 이야기를 들을 때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정확히 뭐가 원인인지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품종 문제일 수도 있고, 나무가 아직 어려서일 수도 있고, 제가 놓치고 있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주 날씨가 체리한테는 조금 다른 도전일 수 있겠다 정도로 이해하고, 더 지켜보는 중입니다.
그래서인지 따뜻한 지역에서 체리를 키우는 분들은 저온요구량이 낮은 품종을 고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밭에 있는 나무들이 정확히 어떤 품종인지, 그리고 그게 저온요구량이 얼마나 낮은 축인지는 저도 아직 자신 있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런 방향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고, 앞으로 나무를 더 들일 때 참고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크게 벌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체리는 아직 크게 벌이지 않고 있습니다. 감귤이나 키위처럼 밭 전체에 자리를 내준 게 아니라, 하우스 한켠에 몇 그루 심어두고 지켜보는 정도입니다. 자리를 잡았다고 말씀드리기엔 아직 이릅니다. 손님상에 떳떳하게 내놓을 만큼의 양도, 확신도 아직은 쌓이지 않았습니다.
서두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되는지 안 되는지 몇 해 더 지켜보고, 이거 되겠다 싶을 때 그때 가서 조금씩 늘려가면 될 일입니다. 무리해서 크게 벌였다가 겨울 한 번에 다 잃는 것보다는, 이렇게 천천히 가는 쪽이 저한테는 더 맞습니다. 밭일이라는 게 원래 마음대로 빨리 되는 일도 아니고요.
화학과에서 배운 실험하는 습관
돌아보면 지금 하는 방식이 화학과에서 배운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험실에서도 처음부터 큰 규모로 반응을 돌리지 않습니다. 작은 시험관 몇 개로 먼저 확인하고, 되겠다 싶을 때 양을 늘립니다. 체리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몇 그루로 먼저 확인하고, 나무들이 겨울을 잘 넘기고 꽃을 피우는 걸 보면서 조금씩 판단해나가는 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체리가 몇 그루뿐인 것도, 실패가 아니라 아직 실험이 끝나지 않은 것뿐입니다.
좋은 체리 고르는 법
체리를 직접 많이 내놓을 형편은 아직 아니지만, 시장이나 마트에서 체리를 고르실 때 참고하실 만한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꼭지가 마르지 않고 싱싱한 초록색을 띠는 것, 색이 진하고 탄력이 있는 것을 고르시면 됩니다. 크기가 고르다고 꼭 맛있는 건 아니어서, 저는 크기보다 색과 탄력을 먼저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꼭지가 시들거나 갈색으로 변해 있다면 딴 지 시간이 좀 지났다는 신호입니다.
체리는 무르기 쉬운 과일이라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씻지 않은 상태 그대로 냉장 보관하시고, 밀폐 용기보다는 종이 상자처럼 숨통이 트이는 곳에 담아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습도가 높으면 쉽게 물러지기 때문입니다. 냉장 보관하면 대략 일주일 정도는 신선도가 유지된다고 하니, 그 안에 드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그래도 매년 봄, 몇 그루씩
그래도 매년 봄이면 체리나무에 꽃이 몇 송이나 피었는지부터 보러 갑니다. 크게 될지 안 될지는 아직 저도 모릅니다. 다만 이렇게 몇 그루씩 지켜보는 것도, 저한테는 농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