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트 · 키위류
밭에서 덜 익은 키위, 부엌에서 마저 익습니다
제가 아홉 살이던 1987년, 아버지가 이 밭에 처음 감귤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지금 그 곁에는 레드키위와 루비키위가 함께 자랍니다. 딱딱한 키위를 사자마자 잘라 드셨다가 시고 딱딱해서 놀라셨다는 분들을 계절마다 꼭 뵙습니다.

딱딱해서 놀라셨다는 분들
박스를 열자마자 잘라 드시고 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고 딱딱해서 이게 정말 잘 익은 게 맞느냐고 물으십니다. 특히 온라인으로 처음 주문하신 분들일수록 이런 전화를 자주 주십니다. 저도 농사를 처음 배울 때는 이 질문이 낯설었는데, 지금은 계절마다 몇 번씩 꼭 듣는 이야기가 됐습니다. 키위는 다른 과일과 달리 딱딱한 채로 상자에 담겨 나가는 게 정상입니다. 상자를 열었을 때의 그 딱딱함은 불량이 아니라, 오히려 며칠 뒤 맛있게 익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잘라서 바로 드시기보다 며칠 두었다가 손으로 눌러보고 드시라고 말씀드리면, 다음번엔 다들 그 말부터 기억해 주십니다.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키위가 나오는 철
제주에서 나는 키위는 보통 가을에 수확해서 12월부터 이듬해 봄 사이에 시장에 나옵니다. 제주가 뉴질랜드와 기후·토질이 비슷해서 키위 농사가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뉴질랜드가 여름일 때 제주는 겨울이다 보니, 계절이 서로 엇갈리며 한 해 내내 키위가 끊이지 않고 시장에 나오는 구조입니다. 저희 밭에서도 감귤 철이 저물어갈 무렵부터 키위가 뒤이어 상자에 담겨 나갑니다. 그래서 이 후숙 이야기도 저한테는 겨울마다 돌아오는 꽤 익숙한 레퍼토리입니다.
일부러 덜 익혀서 보내는 이유
키위를 물렁하게 익힌 채로 상자에 담으면 옮기는 동안 서로 눌려서 물러 터지기 쉽습니다. 무른 키위 하나가 상자 안에서 짓무르면 그 옆에 있는 것들까지 금방 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희를 포함한 대부분의 농가는 키위가 단단할 때, 즉 아직 다 익기 전에 수확해서 내보냅니다. 딱딱한 상태가 오히려 껍질이 상처를 덜 받고, 상자 안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태입니다. 대신 그만큼 익는 과정을 소비자 손에 넘기는 셈인데, 이 부분을 미리 알고 계시면 당황하실 일이 훨씬 줄어듭니다.
에틸렌이라는 기체
제주대 화학과에 다닐 때 식물호르몬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때는 시험 문제로만 스쳐 지나갔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이 단어를 매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에틸렌은 과일이 스스로 만들어 내뿜는 기체 호르몬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냄새가 강하게 나지도 않지만 과일 안에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과일이 익어가는 신호이기도 하고, 동시에 주변 과일의 숙성을 재촉하는 방아쇠이기도 합니다. 밀폐된 공간에 이 기체가 쌓이면, 그 안에 있는 다른 과일들도 덩달아 빨리 물러집니다.
유독 사과와 바나나가 많이 내는 이유
모든 과일이 에틸렌을 똑같이 내뿜는 건 아닙니다. 사과와 바나나는 그중에서도 유독 이 기체를 많이 뿜어내는 대표적인 과일로 꼽힙니다. 바나나 껍질이 며칠 사이에 초록에서 노랑으로, 다시 갈색 반점으로 빠르게 바뀌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정확히 어떤 성분이 얼마나 더 나오는지까지는 저도 논문을 뒤져야 아는 수준이라 자신 있게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후숙시키고 싶은 과일 옆에 사과나 바나나를 두면 효과가 확실히 다르다는 건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딱딱한 키위를 빨리 물러지게 하고 싶을 때, 저는 손님들께 이 두 과일 중 하나를 같이 두시라고 권합니다.
사과냐 바나나냐, 시간은 왜 다르게 말하는가
밀봉한 봉지에 키위와 사과를 함께 넣어 두면 빠르게는 두세 시간 만에 물러졌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조건이 잘 맞으면 실제로 그렇게 빨리 되기도 합니다. 다만 이건 봉지를 얼마나 꽉 밀봉했는지, 사과가 얼마나 잘 익어 있었는지, 그날 실내 온도가 얼마나 따뜻했는지에 따라 크게 갈리는 이야기입니다. 몇 시간 지나서 열어봤는데 아직 딱딱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통은 이틀에서 사흘 정도를 기준으로 잡으시는 게 안전합니다.
바나나와 함께 밀봉하는 경우는 그보다 편차가 적은 편이라, 2~3일이면 대체로 고르게 부드러워집니다. 사과로 급하게 시도해 보시고, 생각보다 더디다 싶으면 바나나 쪽으로 바꿔서 이틀 정도 더 기다려 보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손으로 확인하는 법
저는 충분히 후숙되었는지 확인할 때 손끝보다 손바닥을 씁니다. 키위 전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감싸듯 살짝 눌러 보세요. 복숭아 한 알을 쥐었을 때처럼 폭신하게 들어가면서 탄력이 느껴지면 지금 드시기 딱 좋은 상태입니다. 손가락 하나로 세게 눌러 확인하시면 그 자리만 먼저 물러지고 흠집처럼 남을 수 있으니, 손바닥 전체로 부드럽게 감싸시는 편이 좋습니다. 아직 단단한 느낌이면 하루 이틀 더 기다렸다가 다시 확인하시면 됩니다.
너무 익으면 생기는 일
반대로 너무 오래 두면 과육이 흐물흐물해지고 단맛만 과하게 남습니다. 신맛과 단맛이 함께 있어야 키위 특유의 맛이 사는데, 지나치게 물러지면 그 균형이 무너집니다. 겉으로 봐서는 멀쩡해 보여도 손에 쥐었을 때 힘없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면 이미 지나친 상태로 보시면 됩니다. 이 정도까지 간 것은 그대로 드시기보다는 갈아서 주스나 스무디로 쓰시는 게 오히려 낫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익어갈 때
선물로 키위를 한 상자 받으시면 다 같이 후숙이 진행되다가, 어느 날 보면 절반이 한꺼번에 물러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는 굳이 다 같은 속도로 익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며칠 안에 드실 만큼만 상온에 두시고 나머지는 냉장고로 옮겨 두시면, 낮은 온도가 숙성 속도를 늦춰줘서 물러지는 시점을 뒤로 미룰 수 있습니다. 정확히 며칠을 더 버티는지는 품종과 이미 얼마나 익었는지에 따라 갈리는 편이라 딱 잘라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상온에 둔 것보다는 확실히 천천히 갑니다. 꺼내 드실 때는 다시 실온에 반나절 정도 두셨다가 손으로 눌러 확인하시면 됩니다.
기다리면 되는 일
딱딱하게 왔다고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나머지는 키위가 알아서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