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트 · 키위류
다 익은 키위, 냉장고에 넣으면 훨씬 오래 갑니다
택배 상자를 열면 반갑다가도, 며칠 지나면 걱정이 앞섭니다. 다 드시기 전에 몇 개는 물러버리기 때문입니다. 손님들도 자주 여쭤보시는 부분이라, 이미 잘 익은 키위를 오래 맛있게 두고 드시는 법을 정리했습니다.

한 상자를 다 못 드시는 게 당연합니다
저희 농원에서 키위를 보내드리면 열에 아홉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처음 며칠은 부지런히 드시다가, 어느 순간 남은 것들이 한꺼번에 물러 있더라는 겁니다. 키위 한 상자에는 보통 여러 개가 들어가다 보니, 혼자 사시거나 두 분이 드시는 집에서는 손이 못 따라가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남겨서 버리시는 건 아까운 일이니, 이번 글에서는 이미 알맞게 익은 키위를 최대한 오래 맛있게 두고 드시는 방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도 상자를 쌓아 두고 하나씩 확인하다 보면, 어느새 물러진 게 몇 개씩 나오곤 합니다.
왜 냉장고로 옮겨야 할까요
익어가는 과일이 다 그렇지만, 키위도 상온에 두면 계속 익어갑니다. 먹기 좋게 말랑해졌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 상태로 계속 물러지다가 며칠 안에 과육이 뭉개지듯 변해 버립니다. 반면 냉장고처럼 온도가 낮은 곳에 두면 이 익어가는 속도 자체가 느려집니다. 그래서 저는 상자를 받으시면 앞으로 며칠 안에 드실 만큼만 상온에 남기고, 나머지는 바로 냉장고로 옮기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래야 딱 좋은 상태를 며칠이라도 더 붙잡아 둘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던 버릇이 남아서인지, 저는 이런 걸 볼 때마다 온도와 반응 속도부터 떠올립니다. 냉장고는 결국 그 반응을 늦추는 도구인 셈입니다.
품종마다 며칠이 다릅니다
덜 익은 키위를 빨리 익히는 법은 다른 노트에서 따로 다뤘으니, 여기서는 이미 알맞게 익은 다음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골드 계열 키위는 냉장 보관했을 때 최대 일주일 정도, 신맛이 강한 그린키위는 닷새 정도를 기준으로 보시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트에서 흔히 만나실 수 있는 품종들입니다. 제스프리 쪽 자료에서도 이 기간은 품종과 숙성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으니, 날짜는 참고 정도로만 봐 주시면 됩니다.
저희 루비키위는 조금 다릅니다
저희 농원이 키우는 루비, 레드 계열은 비교적 최근에 자리 잡은 품종이라 며칠까지 간다고 딱 잘라 말씀드릴 만한 기준을 저도 아직 명확히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루비키위를 보내드릴 때는 날짜보다 상태를 자주 확인해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만졌을 때 탄력이 남아 있으면 아직 괜찮고, 물컹하게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서둘러 드시는 게 좋습니다. 품종에 따라 기준일이 다르다는 것만 기억해 두셔도, 냉장고 안에서 무작정 오래 두시는 실수는 줄일 수 있습니다. 골드나 그린을 함께 받아 보시는 분들이 계셔서, 참고하시라고 같이 적어 둡니다.
냉장고 안에서 신경 쓰는 것
냉장고 안에서는 자리도 조금 신경 써 주시면 좋습니다. 사과나 바나나처럼 에틸렌 가스를 많이 내뿜는 과일 곁에 키위를 붙여 두시면, 냉장고 안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예상보다 빨리 물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키위만 따로 자리를 정해 두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문 쪽보다는 안쪽처럼 온도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는 자리가 낫습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온도가 오르내리는 곳은 아무래도 신선도가 빨리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씻는 건 드시기 직전에
그렇다고 꽁꽁 밀봉하실 필요까지는 없고, 통풍이 아주 안 되는 것만 피하시면 됩니다. 씻는 것도 드시기 직전에 하시는 게 좋습니다. 미리 씻어서 물기가 남은 채로 넣어 두시면, 그 습기 때문에 무르거나 곰팡이가 피는 속도가 오히려 빨라질 수 있습니다.
무르기 시작한 것부터 드세요
아무리 신경 써서 보관해도, 상자 안에 있는 키위들이 정확히 같은 속도로 익어가지는 않습니다. 유독 먼저 물러지는 것들이 하나둘 생기게 마련입니다. 특히 상자 아래쪽에 깔린 것들이 무게에 눌려 먼저 물러지는 경우가 많으니, 가끔 자리도 한 번씩 바꿔 주시면 도움이 됩니다. 이미 과육이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면 단맛만 지나치게 남고 식감은 떨어지니, 그런 것들부터 먼저 골라 드시는 게 맛으로도 낭비를 줄이는 데도 낫습니다. 냉장고를 여실 때마다 손으로 한 번씩 살짝 눌러 확인하시고, 물렁한 순서대로 드시는 습관을 들이시면 상자 하나를 끝까지 맛있게 비우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물러진 것까지 버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스무디나 잼으로 돌리시면 오히려 그 정도로 잘 익은 게 더 답니다.
다 못 드시겠다면 얼려두세요
그래도 도저히 그 안에 다 드시기 어려우실 때는 냉동을 권해 드립니다. 껍질을 벗기고 한입 크기로 썰어서 밀폐 용기나 지퍼백에 넣어 얼려 두면, 보통 한두 달 정도는 무리 없이 두고 드실 수 있다고들 합니다. 얼린 키위는 그대로 녹여 드시기보다 우유나 요거트와 함께 갈아 스무디로 드시는 편을 저는 더 추천합니다. 얼렸다 녹인 과육은 조직이 무르기 때문에, 생으로 드실 때의 아삭한 느낌은 아무래도 덜합니다. 상자 하나를 다 비우실 자신이 없으시면, 처음부터 절반쯤은 얼려 두고 시작하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정확한 냉동 기준일이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서, 너무 오래된 건 색이나 냄새를 한 번 확인하고 드시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얼리실 때 봉지에 날짜를 적어 두시면, 나중에 얼마나 됐는지 헷갈리지 않아 편합니다.
제가 손님들께 가장 많이 드리는 말
결국 제가 손님들께 가장 많이 드리는 말은 하나입니다. 다 익었다 싶으면 미루지 마시고 냉장고로, 그리고 물러지는 순서대로 드시라는 것. 그 정도만 지키셔도 한 상자를 끝까지 맛있게 드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