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트 · 감귤류
11월부터 4월까지, 이 밭은 쉬지 않습니다
손님들이 저희 밭에 오시면 꼭 물으시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뭐가 제철이에요?' 감귤은 한 가지로 끝나는 과일이 아니라서,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밭 어딘가에서는 항상 뭔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11월, 온주밀감으로 문을 엽니다
11월이 되면 저희 밭은 온주밀감부터 거둡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냥 '귤'이라고 부르는, 마트에서 가장 흔히 보시는 바로 그 감귤입니다. 모양이 살짝 납작한 편구형이고, 껍질이 얇아서 손으로 까기 편한 게 특징입니다. 노지에서 별다른 시설 없이 나무에 달린 그대로 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익어서, 저희 밭에서는 이게 겨울 감귤 농사가 시작됐다는 첫 신호입니다. 차 트렁크에 그 해 첫 온주밀감 상자를 실을 때 나는 향이, 저한테는 겨울이 왔다는 신호와도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 한라봉이나 천혜향, 레드향 같은 만감류 나무들은 아직 나무에서 천천히 색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12월, 황금향이 겹쳐 들어옵니다
12월에는 온주밀감과 함께 황금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황금향은 1990년 일본 에히메현에서 육성돼 2003년에 정식 등록된 품종으로, 만감류 가운데는 비교적 이르게 나오는 편입니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가 나오는 기간입니다. 속껍질이 얇고 과즙이 유독 풍부해서, 한 알 까면 손끝에 즙이 흥건히 묻을 정도입니다. 처음 보고 낯설어하시던 손님도 한 입 드셔보시면 다음엔 미리 챙겨달라고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온주밀감을 다 거두기도 전에 황금향이 겹쳐 들어오니, 12월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살피느라 손이 바빠지는 달입니다.
만감류는 왜 이렇게 늦게까지 나올까요
온주밀감은 노지에서 자랍니다. 나무가 겨울 찬 바람을 그대로 맞으면서 11~12월 사이에 다 익어버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한라봉이나 천혜향, 레드향 같은 만감류는 겨울을 넘겨서까지 나무에 달려 있어야 하다 보니 대부분 하우스 안에서 자랍니다. 감귤나무는 기온에 유난히 민감해서, 겨울철 온도가 맞지 않으면 다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잘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겨울철엔 하우스 온도를 자주 들여다보는 것도 저희 일과 중 하나입니다. 저희 밭도 온주밀감이 있는 자리와 만감류가 있는 자리를 나눠서 관리합니다.
1월, 세 가지가 한꺼번에 나옵니다
1월은 저희 밭에서 가장 정신없는 달입니다. 황금향이 마지막 물량을 내놓는 동시에 한라봉과 천혜향이 새로 나오기 시작하고, 11월부터 이어온 레드향도 여전히 나무에 달려 있습니다. 한라봉은 한라산 봉우리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은 대로, 꼭지가 톡 튀어나온 게 특징입니다. 천혜향은 반대로 껍질이 얇고 매끈해서 손으로 까기 편합니다. 손님 한 분이 오셔도 어떤 걸 몇 개씩 담아드리느냐에 따라 상자 안 구성이 매번 달라지는 게 이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손님 취향을 먼저 여쭙는 게 오히려 빠릅니다.
2~3월, 한라봉이 절정을 지나갑니다
2월과 3월로 넘어가면 한라봉이 절정을 지나 마무리에 들어갑니다. 껍질은 두껍고 거친 대신 과육은 부드럽고 단맛이 진한 게 한라봉의 매력인데, 이 무렵 나오는 것들이 가장 물이 오른 상태입니다. 한라봉을 다 거둔 나무는 그때부터 다음 해를 준비하는 손질에 들어가고, 아직 거두지 않은 천혜향과 레드향 나무는 계속 자기 속도로 익어갑니다. 어떤 나무부터 손대야 할지도 눈과 손으로 가늠해서 정하는데, 더 기다리면 물러질 나무부터 먼저 거둡니다. 같은 밭 안에서도 나무마다 하는 일이 다른 셈이라, 손이 부족한 날엔 식구들 손까지 보태야 합니다.
4월, 천혜향과 레드향으로 마무리합니다
4월이 되면 천혜향과 레드향이 그 해 감귤 농사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천혜향은 신맛이 적고 향이 풍부해서 신 걸 못 드시는 분들도 편하게 드시고, 레드향은 이름처럼 붉은 기가 도는 색과 높은 당도로 마무리를 화려하게 합니다. 특히 레드향은 11월부터 4월까지, 다섯 가지 가운데 가장 오래 나오는 품종입니다. 첫 손님부터 마지막 손님까지 레드향 하나로 계속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셈입니다. 이 무렵엔 하우스 문을 여닫는 손도 바빠지고, 다음 철을 준비하며 빈 상자를 정리하는 것도 저희 몫입니다. 4월 말 마지막 상자를 부치고 나면, 그제야 그 해 감귤 철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겹치는 달에는 상자를 섞어 드립니다
1월처럼 여러 품종이 한꺼번에 나오는 달에는, 손님이 원하시면 한 상자에 두세 품종을 섞어서 담아드리기도 합니다. 한라봉 몇 개에 천혜향을 조금 더하고, 레드향을 색으로 포인트 삼아 넣는 식입니다. 이렇게 섞어 담으면 집에서 하나씩 까먹으며 어떤 품종이 자기 입에 더 맞는지 비교해보실 수도 있습니다. 품종을 하나만 고르기 어려워하시는 분들껜 오히려 이 방법을 먼저 권해 드리는 편입니다.
"지금 뭐가 제철이에요?" 물으시면
이 질문을 받으면 저는 우선 몇 월인지부터 여쭙니다. 11월이면 온주밀감을, 12월이면 온주밀감과 황금향을, 1월이면 그 넷이 거의 다 겹치니 취향을 여쭤보고 골라드립니다. 2~3월이면 한라봉이 한창이라고 말씀드리고, 4월이면 천혜향이나 레드향을 권합니다.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매번 다르게 답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머릿속에 달력 한 장만 있으면 되는 일입니다. 자주 오시는 손님들은 몇 번 사가시다 보면 저처럼 달을 보고 뭐가 나올지 먼저 짐작하시게 됩니다.
겨울 밭이 하는 일
겨울 내내 저희 밭에서 하는 일은 사실 단순합니다. 한 나무를 거두는 동안 다른 나무는 자기 속도로 자라고, 수확이 끝난 나무는 다음 해를 준비하는 손질에 들어가고, 아직 덜 익은 나무는 날씨를 살피며 기다리는 게 전부입니다. 화려한 이벤트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순서를 놓치지 않는 일의 연속입니다. 한림에서 나고 자라며 겨울마다 지켜본 게 이 순서라서, 이제는 달력을 안 봐도 어떤 나무가 무슨 일을 할 차례인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아버지가 1987년에 처음 감귤나무를 심으셨을 때도 아마 이 순서를 몸으로 익히셨을 겁니다. 저는 그 순서를 물려받아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당도로 보면 황금향은 13~14Brix, 레드향은 13Brix 이상으로, 이 시기 나오는 감귤 중에서는 당도가 높은 축에 듭니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버릇이 남아서인지, 겨울 밭을 걸을 때면 저는 종종 나무마다 몇 도짜리일지 가늠해보곤 합니다.
겨울 내내 쉬지 않는 밭
11월에 온주밀감으로 시작해서 4월에 천혜향과 레드향으로 끝나기까지, 저희 밭은 한 번도 완전히 쉬지 않습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다음 겨울도 이렇게 이어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제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