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트 · 감귤류
가장 늦게까지 남는, 가장 붉은 귤
만감류 중에서 유독 늦게까지 나무에 남아 있는 게 레드향입니다. 색도 다른 감귤보다 붉어서, 상자를 열면 한눈에 표가 납니다.

색부터 다른 귤
저는 1978년생으로 한림에서 나고 자랐고, 1987년에 아버지가 시작한 이 농원을 지금까지 잇고 있습니다. 밭에는 한라봉과 천혜향, 레드향까지 만감류 나무가 여럿 서 있는데, 상자를 열었을 때 손님이 가장 먼저 손을 뻗는 건 대개 레드향입니다. 한라봉이나 천혜향이 진한 주황빛이라면, 레드향은 거기서 한 톤 더 짙어져서 붉은 기운이 돕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멀리서 보면 다홍색 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라, 밭을 둘러보시는 분들이 이름을 묻기 전에 색부터 알아보시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상자로 포장해 놓아도 이 색만큼은 다른 만감류 사이에서 확실히 표가 납니다. 한림에서 나고 자라 이 색을 수십 번째 겨울째 보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상자를 열 때마다 눈이 먼저 갑니다.
한라봉과 서지향이 만나서
레드향은 한라봉과 온주밀감류인 서지향을 교배해서 나온 품종입니다. 그러니까 뿌리를 따져보면 저희 밭에 있는 다른 나무들과 완전히 남이 아닌 셈입니다. 정확히 어느 해에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까지는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지금은 만감류로 분류되어 한라봉, 천혜향과 나란히 겨울 감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라봉의 진한 단맛과 온주밀감의 익숙한 골격이 함께 들어 있다고, 저는 손님들께 편하게 풀어서 설명하곤 합니다. 이름 끝에 붙은 향이라는 글자도 천혜향, 황금향과 같은 계열이라는 걸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인지 레드향은 다른 만감류보다 감귤 본연의 친숙한 맛에 조금 더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 손님들도 계십니다.
만감류라는 자리
레드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만감류라는 자리부터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가 가을에 수확하는 노지 감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온주밀감은 밭에 그대로 두고 키워서 11월에서 12월 사이에 거둡니다. 반면 한라봉이나 천혜향, 레드향 같은 만감류는 겨울을 넘겨야 하는 품종이 많아서 하우스 안에서 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흔하고 저렴한 노지 감귤과 달리, 만감류는 향이 진하고 상대적으로 귀하게 여겨지는 편이라 선물이나 특별한 자리에 더 자주 오릅니다. 레드향도 이 계열에 속해 있으니, 붉은 색이 주는 인상에 만감류 특유의 고급스러운 느낌까지 함께 따라오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손님들께 레드향을 소개할 때, 귀한 만감류 중에서도 색이 가장 확실한 녀석이라고 말씀드리곤 합니다.
셋 중 가장 긴 제철
레드향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나옵니다. 한라봉이 1월에서 3월, 천혜향이 1월에서 4월인 것과 비교하면, 레드향이 나무에 붙어 있는 기간이 셋 중 가장 깁니다. 저희 밭 기준으로도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레드향 상자를 계속 내보내는 셈이라, 겨울 내내 일손이 끊기지 않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다른 만감류가 한창때를 지나 자리를 비울 무렵에도 레드향은 여전히 나무에 남아 있어서, 저는 이 나무를 겨울의 마지막 주자라고 부르곤 합니다. 연말 선물철부터 설 명절, 그리고 봄이 오는 길목까지 걸쳐 있다 보니, 계절 인사를 챙기실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레드향을 찾는 손님이 많아집니다.
당도는 높고, 신맛은 적고
레드향은 당도가 13Brix 이상으로 꽤 높게 나오는 편입니다. 다만 이 수치는 평균치라서, 같은 나무에서 나온 열매라도 개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도를 재는 원리 자체는 다른 지면에서 따로 다루고 있으니 여기서는 숫자만 가볍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확실한 건 신맛이 적다는 점인데, 그래서 신 걸 못 드시는 분들도 레드향만큼은 편하게 드시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저희 밭에서 시식을 권해드릴 때도 이 점을 가장 먼저 말씀드리는 편입니다.
저는 제주대에서 화학을 공부했는데, 신맛이라는 건 결국 유기산의 농도 문제입니다. 레드향이 무난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산도가 낮은 쪽으로 잡히기 때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고르실 때는 무게를 보세요
레드향을 고르실 때 색만 보고 판단하면 오히려 헷갈릴 수 있습니다. 다른 감귤은 색이 진할수록 당도가 높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레드향은 품종 자체가 원래 붉은 기운을 띠고 있어서 색으로만 단맛을 가늠하기는 애매합니다. 그래서 저는 손님들께 크기보다 무게감을 먼저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같은 크기라도 손에 들었을 때 묵직한 쪽이 즙이 많고, 껍질 상태와 물러진 곳이 없는지를 함께 살피시면 실패가 적습니다. 이 기준은 한라봉이나 천혜향을 고르실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저희 밭에서 오래 써 온 방법입니다.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열매는 수분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으니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선물로 많이 나가는 이유
레드향이 선물용으로 많이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색이 화려해서 상자를 열었을 때 받는 분의 첫인상이 좋습니다. 신맛이 적으니 받으시는 분의 입맛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제철이 길어서 명절 시기와 겹치는 때가 많다는 것도 한몫합니다. 저희 농원에서도 겨울 선물 문의가 오면 레드향을 가장 먼저 권해드리는 편이고, 받아보신 분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전해 듣습니다. 포장을 열었을 때 색부터 다른 과일이라, 정성이 더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도 자주 하십니다. 명절 선물 목록에 감귤을 올리신다면, 저는 레드향을 하나쯤 섞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보관은 다르지 않습니다
보관하는 법은 다른 감귤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다룬 요령 그대로, 바로 드실 거면 실온에 하루 이틀 두시고, 오래 두고 드실 거면 씻지 말고 냉장 채소칸에 넣으시면 됩니다. 레드향이라고 특별히 다르게 손이 가는 과정은 없습니다.
가장 오래, 가장 붉게
레드향은 저희 밭에서 가장 오래, 가장 붉게 남는 나무입니다. 그 색이 눈에 익을 때쯤이면, 겨울도 절반쯤 지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