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노트 · 감귤류
그 나무는 저보다 아홉 살 어립니다
1987년, 아홉 살이던 저는 아버지 옆에 서서 한림 밭에 감귤나무 묘목이 심기는 걸 지켜봤습니다. 그러니 이 나무는 저보다 아홉 살이 어립니다. 사람의 시간과 나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지만, 그해부터 지금까지 저는 이 나무와 함께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 해, 밭에 나무가 심기던 날
1987년 그맘때, 아버지는 한림 밭에 감귤나무 묘목을 심었습니다. 아홉 살이던 저는 그 옆에 서서 아버지가 흙을 다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습니다. 며칠에 걸쳐 밭 전체가 새 나무로 채워졌는데, 정확히 며칠이 걸렸는지는 이제 기억이 흐릿합니다. 다만 그해 내내 밭에서 유독 짙은 흙냄새가 났던 것만은 지금도 또렷합니다. 아버지 등 뒤에 서서 그 냄새를 맡던 아홉 살의 저를, 저는 아직도 가끔 떠올립니다.
그 무렵 제주에서는 감귤나무를 심는 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1980년 즈음부터 감귤은 이미 제주를 대표하는 소득 작물로 자리를 잡았고, 1980년대 내내 제주 농가 소득의 절반 이상을 감귤 하나가 채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작물이 아니라 감귤나무를 선택한 데는, 그런 시대의 흐름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때 아홉 살이라 그런 사정까지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는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였고, 마스코트 호돌이 홍보가 전국을 들썩이게 하던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밭에 그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무렵입니다. 다만 그 사연은 저희 농원 소개에 이미 담아뒀으니, 여기서는 짧게만 남겨둡니다.
감귤나무가 자라는 시간
감귤나무는 심는다고 그해 바로 열매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묘목이 땅에 뿌리를 제대로 내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가지를 뻗고 스스로 몸피를 키우는 동안에는 사람이 먹을 만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어린 나무가 쓸 만한 열매를 처음 내어주기까지는 보통 여러 해가 걸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몇 년째부터라고 못 박기는 어렵습니다. 땅의 상태와 그해 날씨, 나무 하나하나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심은 그 나무들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심고 나서 몇 해 동안은 밭에 나가도 열매보다 잎이 더 무성한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지금 와서 짐작만 합니다. 그 몇 해를 묵묵히 기다려야, 나무는 비로소 나무다워집니다.
묘목에서 성목이 되기까지는 그만큼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물을 주고, 가지를 다듬어주고, 병충해를 살피는 것 정도입니다. 나무가 스스로 자랄 시간을 벌어주는 일이라고, 저는 그 시절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서른아홉 해를 살아온 나무
올해로 그 나무는 서른아홉 해를 살았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한창 일할 나이지만, 나무의 시간은 사람과 다르게 흐릅니다. 감귤나무는 짧게 살고 마는 나무가 아니어서, 서른아홉 해는 나무에게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닙니다. 관리만 잘하면 사람의 한 생애보다 오래 사는 나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참을 더 살아갈 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이, 특히 최근 들어 제주 곳곳에서는 오래된 과수원을 갈아엎고 새 나무를 심거나 다른 작물로 바꾸는 농가가 늘었습니다. 나무가 나이 들면 품질을 관리하기가 까다로워지고, 일손이 부족한 농가일수록 손이 덜 가는 만감류나 다른 작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도 저희 밭의 이 나무는 여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갈아엎을 이유가 없었다기보다, 이 나무를 갈아엎을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쪽이 더 맞는 말일 겁니다.
나이 든 나무와 젊은 나무의 차이
나이 든 나무와 젊은 나무는 확실히 다릅니다. 어린 나무는 뿌리가 아직 얕아서, 가뭄이 조금만 길어져도 잎이 금세 처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오래 자리를 지킨 나무는 그 세월만큼 뿌리를 땅속 깊이 뻗어놓아서, 웬만큼 가문 날씨에도 젊은 나무보다 훨씬 의연합니다. 제가 밭에서 직접 보고 느낀 바로는 그렇습니다.
열매가 맺히는 모습도 다릅니다. 어린 나무는 해에 따라 열매가 많이 달렸다 적게 달렸다 기복이 있는 편이지만, 나이 든 나무는 그런 기복이 한결 덜한 편입니다. 대신 어린 나무만의 장점도 있습니다. 손이 덜 타서 가지치기나 병해충 관리가 비교적 수월하고, 새로운 재배 방식을 적용하기도 더 쉽습니다.
뿌리가 깊고 넓게 뻗을수록 흡수할 수 있는 물과 양분의 범위도 넓어집니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할 때 배운 원리가, 밭에 나가면 나무 한 그루에서 그대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무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
저는 이 나무보다 아홉 살이 많습니다. 아홉 살에 나무가 심기는 걸 지켜봤으니, 나무의 첫해부터 지금까지를 전부 곁에서 본 셈입니다. 나무가 아직 어려서 열매보다 잎이 무성하던 시절도, 처음 눈에 띌 만큼 열매를 맺던 해도, 지금처럼 줄기가 굵어지고 뿌리가 깊어진 지금의 모습도 전부 제 기억 속에 있습니다. 한림을 떠난 적이 없으니, 저는 이 나무와 같은 땅에서 같은 계절을 서른아홉 번 났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걸 지켜보며 저도 자랐다는 게, 밭에 오래 서 있다 보면 실감이 나는 일입니다.
밭에 나가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아홉 살의 제가 함께 떠오릅니다. 그때는 나무도 저도 자라는 중이었고, 지금은 나무도 저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사이 흘러간 서른아홉 해가, 저에게는 그대로 이 밭에서 보낸 인생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나무를 대하는 법
오래된 나무라고 손을 놓아도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 든 나무일수록 가지치기 시기나 거름 주는 때를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젊은 나무는 조금 서툴게 다뤄도 스스로 회복하는 힘이 있지만, 나이 든 나무는 한 해 잘못 다루면 그 여파가 다음 해까지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 앞에 설 때는 늘 조금 더 신중해집니다.
아버지가 심은 나무를 제가 망가뜨릴 수는 없다는 마음도 있고, 서른아홉 해를 버텨온 나무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매년 같은 자리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걸 보면, 나무가 저보다 훨씬 꾸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꾸준함을 지켜주는 게 지금 제가 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내년에도, 그 자리에
나무는 내년에도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저는 그저 지금처럼, 그 곁을 지키며 한 해씩 나이를 더해가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