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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류 노트

농부의 노트 · 감귤류

감귤 상자를 열면, 그때부터가 보관입니다

선물로 받은 감귤 한 상자, 며칠 두었다가 열어보니 밑에 몇 개가 물러 있던 경험 있으실 겁니다. 사실 저희 집도 다르지 않습니다. 밭에 있는 건 그때그때 따 먹지만, 누가 보내준 상자는 며칠 잊고 있다가 그런 일이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귤을 오래, 맛있게 두는 법을 정리해봤습니다.

보관 중인 감귤류

상자째 두면 자꾸 이런 일이 생깁니다

저는 밭에 있는 감귤은 그때그때 따 먹다 보니 이런 고민을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상자로 받으신 건 얘기가 다릅니다. 상자 안에서는 감귤끼리 서로 맞닿아 있고, 바닥 쪽은 위쪽보다 온도와 습도가 더 높습니다. 게다가 상자는 대체로 며칠씩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두게 되니, 밑에서 무르기 시작한 걸 알아챌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상자를 받으신 날, 일단 한 번 열어서 상태를 확인하시는 게 첫 번째로 할 일입니다.

씻지 않고 보관해야 하는 이유

두고 드실 감귤은 보관하시기 전에 씻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씻고 나면 겉면에 물기가 남는데, 이 물기가 마르지 않은 채로 상자나 봉지 속에 갇히면 곰팡이가 훨씬 쉽게 자리를 잡습니다. 실온이든 냉장고든 이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씻는 건 보관할 때가 아니라, 드시기 바로 직전으로 미루시면 됩니다. 급하게 씻어서 물기가 남은 채로 담아두시는 것보다는, 조금 귀찮으시더라도 그때그때 씻어 드시는 편이 훨씬 오래갑니다.

바로 드실 거면, 실온입니다

오늘이나 내일 안에 드실 거라면 냉장고보다 실온이 낫습니다. 18~22도쯤 되는 곳에 하루 이틀 두시면 당도와 향이 한층 더 살아납니다. 서늘하고 바람이 통하는 자리라면, 꼭 오늘 다 안 드셔도 실온에서 1~2주 정도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다만 여름철처럼 실내가 더울 때는 얘기가 다릅니다. 그럴 때는 다음에 말씀드릴 냉장 보관 쪽으로 넘어가시는 게 낫습니다.

오래 두실 거면, 냉장고 채소칸입니다

더 오래, 확실하게 두고 싶으시면 냉장고 채소칸이 낫습니다. 채소칸은 냉장고 안에서도 온도 변화가 적은 자리라 감귤이 갑자기 얼거나 마르는 걸 막아줍니다. 이때도 씻지 마시고, 하나씩 키친타올로 감싸서 겉면 습기를 흡수시켜 주세요. 비닐봉지에 완전히 밀봉하기보다는 숨 쉴 틈을 조금 남겨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이렇게 두시면 짧게는 일주일, 서늘하게 잘 관리되면 2~4주까지도 신선하게 갑니다.

한 상자를 통째로 두지 마세요

상자 하나를 통째로 냉장고에 넣거나, 통째로 실온에 두시기보다는 나눠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이삼일 안에 드실 만큼만 실온에 꺼내두시고, 나머지는 바로 냉장고 채소칸으로 옮기시면 됩니다. 이렇게 나눠두시면 실온에 둔 것들은 당도가 오르고, 냉장고에 둔 것들은 천천히 상태를 유지합니다. 상자를 그대로 두는 것보다 손이 조금 더 가지만, 결과적으로 더 오래 더 맛있게 드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상한 것 하나가 상자를 다 버립니다

보관하시기 전에 꼭 한 가지는 먼저 해주세요. 무르거나 껍질이 갈라진 게 있으면 먼저 골라내시고, 그런 것부터 먼저 드시는 순서로 정리하시는 겁니다. 상한 것 하나를 다른 것들과 함께 그대로 두면, 그 하나에서 시작된 게 상자나 봉지 전체로 번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실제로 상한 자리 바로 옆에 있던 것부터 물러지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자를 열면 습관처럼 한 바퀴 훑어보고, 무른 것부터 따로 빼둡니다.

곰팡이는 포자로 퍼지는 미생물이라, 상한 자리에서 만들어진 포자가 공기 중으로 흩날려 옆에 있는 멀쩡한 감귤 표면에 내려앉습니다. 화학과를 나왔지만, 요즘은 이런 미생물 얘기가 밭보다 부엌에서 더 자주 떠오릅니다.

이런 신호가 보이면 바로 확인하세요

상자 바닥이 눅눅하거나 얼룩이 져 있으면, 그 밑에 물러진 게 있다는 신호입니다. 상자를 열었을 때 새콤달콤한 냄새가 아니라 시큼하고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면, 어딘가에 곰팡이가 슬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럴 때는 상자 전체를 한 번 다 꺼내서 확인하시는 게 낫습니다. 몇 개만 상한 거라면 그것만 골라내시고, 나머지는 앞서 말씀드린 방법대로 다시 나눠 보관하시면 됩니다.

며칠에 한 번은 다시 열어봐 주세요

상자를 처음 여신 뒤에도, 며칠에 한 번씩은 다시 한번 살펴봐 주시면 좋습니다. 특히 날씨가 따뜻해지는 시기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도 상태가 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손으로 살짝 눌러봐서 물렁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골라내시면, 상자 전체가 상하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귀찮으신 건 알지만, 상자째 며칠씩 잊고 계시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물러지기 직전이라면, 청으로

완전히 상한 게 아니라 살짝 물러지기 시작한 정도라면, 버리지 마시고 청으로 만들어보세요. 과육과 설탕을 1대1 비율로 섞어서 냉장고에 서너 밤 정도 숙성시키면 감귤청이 됩니다. 탄산수나 우유에 타서 드시면 에이드나 감귤라떼가 됩니다. 이렇게 활용하시면 상자에 있는 걸 하나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다 드실 수 있습니다. 청은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두시면 두고두고 드실 수 있어서, 오히려 상자보다 오래갑니다.

저희 한라봉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것도 대부분 한라봉이나 천혜향 같은 만감류입니다. 이 친구들은 껍질이 두꺼운 편이라 겉보기엔 오래갈 것 같지만, 보관 원칙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대로, 씻지 마시고 상한 것부터 골라내신 다음 드실 계획에 맞춰 실온과 냉장고를 나눠 쓰시면 됩니다. 오히려 껍질이 두꺼운 만큼 무른 걸 겉에서 알아채기 더 어려우니, 손으로 한 번씩 눌러 확인해 보시는 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겉모습만 보고 안심하지 마시고, 손으로 한 번 더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시는 것

보관 얘기를 하다 보면 손님들께 자주 받는 질문이 두어 가지 있습니다. 가장 많이 받는 건 '씻어서 넣어도 되나요'인데, 답은 아닙니다. 씻는 건 드시기 직전으로 미뤄두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두 번째는 '냉장고에 넣으면 맛이 떨어지지 않나요'인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드시기 한두 시간 전에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두시라고 권해드립니다.

끝까지 맛있게

저희가 정성껏 키워 보내드려도, 마지막 며칠을 어떻게 두시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씻지 않고, 상한 것부터 골라내고, 드실 계획에 맞게 실온과 냉장고를 나눠 쓰시면 됩니다. 그 정도만 지키셔도, 상자를 다 비우실 때까지 처음 그 맛 그대로 드실 수 있습니다.